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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 (inst.) - 헤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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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형!”

 

  선우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꼭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타박하는 투에, 훤히 드러난 이마 위 얹힌 눈썹도 일그러져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건호의 표정과는 달리, 선우의 얼굴 근육은 시시각각 떨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이, 혹은, 상관없다는 듯이 건호는 일정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옆을 따르는 선우의 종종거리는 걸음거리에 코트 자락이 일렁였다. 통통 튀며 촐싹이는 걸음에도 코트 밑단이 그대로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은 순전히 코트의 무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추워, 진짜루.”

 

  거센 항의의 핵심은 늘 이런 식으로 싱거운 것이었다. 아주 약간의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들. 그런 인내심 조차 갖추지 못한 이에게는 심히 짜증을 낼 법한 일이기도 할테다. 선우가 팔짱을 끼워 데워두었던 손으로 제 빈 이마를 텁 덮어 얹었다. 그러나 가죽장갑은 그닥에 따듯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검은 가죽장갑 안에 갇힌 손은 답답하기만 해 한층 더 짜증이 일었다. 확 이거 벗어버릴까. 건호의 눈치를 보다 손을 몇 번 쥐락펴락 하는 선우다.

  그즈음 되니 잇속으로 찬 바람이 드는 것조차 싫은 듯 선우가 답잖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 그제야 건호가 잠잠해진 선우를 돌아보았다. 불만을 표하는 얼굴의 인상이 평소와 다른 빛깔인 것이 새로웠다. 머리는 차분하게 톤을 정리해 깔끔히 넘겼다. 드러난 이마는 티 하나 없이 넓고 예뻤다. 앞머리를 덮고 다닐 때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마다. 그 아래 단정한 눈썹은 부러 더 어둡게 칠했다. 입을 열기 전까지만이라도, 깨지지 않을 어떤 분위기를 위해서. 딱 입을 열기 전까지만이라도.

  소위 '앵두 같은' 입술이라는 말이 어울리던 입술 역시 한 톤 차분한 빛깔을 얹어 덮었다. 멀끔한 정장도, 광이 나는 구두도, 그의 어깨에 무겁게 얹힌 검은 코트도, 건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하나 없었다. 나름 마음에 찬다는 눈으로 그런 선우를 한 번 더 찬찬히 훑어보는 건호를 쏘아보는 선우는 오늘의 자리를 위해 준비한 착장이 그닥 맘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치켜뜬 선우의 한 쪽 눈과 건호의 눈이 마주쳤다. 뭐! 잔뜩 불만스러운 눈빛을 쏘는 큰 두 눈동자에 낮게 깔린 겨울 햇살이 들어 검었다. 채도 낮은 빛깔을 띄는 입술이, 추위 때문일지, 어쩐지 창백해보이기도 해, 그를 볼 때에 아주 잠시 가여운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선우의 것보다 두 배는 무거운 코트 자락이 느리게 선우의 앞으로 움직였다. 금세 순하게 돌아온 선우의 두 눈동자가 건호를 올려다보았다. 큰 구슬 같아, 가끔 툭, 떨어져 구르진 않을까 걱정 되곤 하는 그의 눈동자. 저를 언제나 따라다니는 눈동자. 그 아래엔 훤히 드러난 길고 흰 목이 있었다. 이렇게 엉성하게 매고 있으니 춥지. 아까 매주었던 것이 하도 종종거리느라 그랬는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 목도리를 건호가 스륵 풀어내었다. 완전히 드러난 목에 찬바람이 지나가 선우가 어깨를 움츠렸다. 목도리 매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던가. 

  건호가 목도리를 도로 접어 잡자 선우가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다. 십 센치 가량 차이나는 그들의 키에는 굳이 목을 숙일 필요가 없었더라도. 도로 뒷목부터 감싸오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감각에 속으로 히, 웃은 선우다. 다시 고개를 들어 건호를 올려다보면 제 목에 시선을 두어 내리깐 눈이 보였다. 따듯하게 목이 감기고, 얼마 되지 않는 부피의 그 천쪼가리에 얼굴을 파묻고 싶어질 즈음, 선우는 외려 몸을 쭉 빼 건호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에 반사적으로 감겼던 눈을 도로 뜨며 건호가 선우의 목도리를 마저 정리해주었다. 두터운 검은 손이 선우의 가슴팍을 눌렀다가 떨어졌다. 이제 됐다, 하듯이.

  따듯행. 콧소리 잔뜩 섞인 투로 선우가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추워, 따듯해, 좋아, 싫어. 참으로 단순한 녀석이다. 참으로 단순하고, 또, 손이 많이 가는 녀석. 건호가 도로 걸음을 떼는데, 옆에서 평소처럼 앵겨붙는, 걸려오는 팔이 있다. 구겨진다고 하지 말랬는데. 놓으래도 안 놓겠지. 이러다 머리도 풀릴텐데. 그런 자잘한 건호의 걱정을 모르는 선우는 마냥 따듯해, 따듯해, 금세 들뜬 기분으로 코트 자락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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