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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원은 여름이 싫었다. 힘차게 귓전을 때리는 매미 소리도, 찌는 듯한 한낮의 무더위도, 눈치 없이 이르게 세상을 비추는 긴 해도 다 싫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싫은 것은 그를 잠 못 들게 하는 열대야였다. 불면의 계절인 여름의 밤은 태원에겐 피로한 백야와 다름 없었다.

  어렵사리 잠에 들면 나쁜 꿈에 시달렸다. 어떤 이들에겐 환절기마다 찾아오는 감기처럼, 태원은 여름이면 악몽을 앓았다. 하도 오래되어 기억이라 부르기에도 어려운 상념들이 축축한 땀으로 온몸을 적셨다. 꿈에서 깨고 나면 떨리는 몸을 지독한 고독으로 둘러야 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문을 열고 나와도 방 안과 다르지 않은 거실의 공기가 숨을 막히게 했다. 어둠 속에서 태원은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갑게 식혀둔 보리차를 꺼냈다. 속에 들어찬 불을 끄려는 듯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베란다 창을 아예 젖혀 열히니 아주 조금은 선선한 공기가 땀을 식혔다. 그저 푸르러서 미운 여름의 초새벽은 금세 하얗게 얼굴을 씻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다시 작열하는 태양 아래 긴긴 하루가 이어질 것이다. 오늘 잠은 다 잔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요 며칠 연이어 잠을 설쳤기에 감기어 오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이라도 감고 있자는 심산으로 소파에 앉아 턱을 괴었다. 멈춘 바람에 머리칼 한 가닥 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매미가 깰 시간은 아닌 듯, 온 세상이 텅 빈 듯이 조용했다. 혼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혼자임이 분명하였기에.

 

  그러나 잠들어 있지 않은 이는 태원뿐만이 아니었다. 저절로 떠진 건호의 눈에 희미하게 천정의 형체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음식을 짜게 먹은 것도 아닌데 목이 탔다. 물을 마시러 나갈까, 다시 잠을 청해볼까, 고민하는 건호의 귀에 거실의 기척이 들렸다. 태원이다. 이 이른 시간에 일이 생겨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역시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이리라.

  조심스레 일어나 열린 방문 틈새 사이로 들어온 파란 새벽을 밟았다. 숨 죽여 내다본 거실의 소파에 앉은 태원의 뒤통수가 보였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다녀가는 산타의 자취를 맞닥뜨린 아이마냥 건호의 심장이 뛰었다.

  동트기 전이어서일지 그의 뒤통수가 유독 까매보였다. 꼭 깊은 구멍이 난 듯이.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아 건호는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하지만 까만 뒤통수에 떠오른 표정을 모른체 하고 싶지 않아 건호는 그 뒤통수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쓸쓸함이라는 것을 깨닫자, 손끝이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홀로인 그의 민낯을 훔쳐본 것이 미안해서였을까, 그 쓸쓸함에 나란해지는 마음이었을까.

  이대로 거실에 발을 디디면, 무겁고 또 한없이 깊어보이는 그 외로움의 영역에 비해 너무도 가벼운 발자국을 가진 저가 함부로 침범하는 꼴이 될 것 같아, 건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야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대로 굳은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한 건호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태원이 건호의 기척을 느낀 건 그때에서야였다. 제 뒤통수에 콕 박히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태원이 느리게 눈을 뜨며 턱을 손바닥에서 살짝 떼어냈다. 자신의 바로 뒤쪽에 있는 방에 다른 이가 잠들어있다는 것을, 태원은 처음 깨달은 것 같았다. 그것이 마치 평생에 걸쳐 처음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자신의 착각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래서 태원은 건호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의 발걸음에 귀기울였다. 한참이 지나도 그는 미동도 없는 듯 했다.

  역시 착각이었는지, 뒤를 돌아본 태원과, 마악 문을 열어 젖히기로 결심한 건호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어떤 말부터 꺼내야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얼굴로 하는 사람들처럼. 그 찰나의 순간이 참 길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건호였다.

 

  “…물 마시려구요. …형도 마실래요?”

 

  건호는 잠이 덜 깬 사람의 목소리를 꾸며내지 못했다. 반 박자 느리게 덧붙인 그의 물음이 그의 말을 더욱 핑계처럼 들리게 했다. 태원의 귀엔 마냥 앳되고, 또 어색한 목소리다. 태원은 그 목소리로 그가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을지 가늠하여 보았다.

 

  “그래.”

 

  그렇게 대답하고 태원은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갑작스런 마주침에 대처해야하는 법을 모르는 것은 건호 뿐만이 아니었다. 시선을 멀게 던져놓고 귀는 건호의 발걸음을 좇았다. 식탁 위엔 태원이 방금 썼던 유리컵이 놓여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건호는 유리컵 두 개를 새로 꺼냈다. 건호가 훨 가벼워진 보리차 물통을 기울여 물을 따르는 동안, 태원은 잠시 동안 더 눈을 감고 있었다.

  건호가 물컵을 가져와 태원에게 건네었고, 태원은 말 없이 받아들었다. 그런 태원의 눈치를 살짝 보는 듯이, 한 면은 푸르고 한 면은 검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건호는 소파 대신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호가 늘 앉던 태원의 반대편 자리가 아닌 태원의 옆자리, 그 아래 바닥에. 언제나 비어있던 세 칸 짜리 소파, 그 가운뎃자리의 바닥에. 건호는 두 손으로 찬 물컵을 꼭 쥐고 무릎을 모아 앉아 말 없이 저가 떠온 물만 들여다봤다.

  답지 않게 구는 건호를 태원이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태원의 눈에 건호의 검은 뒤통수가 들어왔다. 까슬까슬한 학생 머리 아래로 드러난 뒷목이 참 얌전했다. 꼭 뜨거운 것을 식혀 마시듯 한껏 웅크리고 앉은 건호의 뒤통수에 적힌 말을 읽으려 태원도 건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아까 건호가 그리했던 것처럼.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괜히 붙어앉아놓곤 조용한 건호의 마음을 태원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태원은 가까운 그의 피부 주변 공기가 참 따듯하다고 느꼈다. 싫지 않았다.

 

  “왜 깼니.”

 

  어느 새가 창 밖에서 울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건호가 물어봐주길 바라는 것 같다고 태원은 생각했다.

  호록, 찬 보리차를 홀짝이던 건호가 고개를 더욱 숙이며 대답했다.

 

  “……물 마시러요.”

 

  싱거운 녀석. 태원이 속으로 웃었다. 자신의 물음이 건호에게 되물을 구실이 되어준 것까진 알지 못 했다.

 

  “형은요?”

 

  그랬기에 태원은 바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건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지만 태원은 제 표정을 가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태원의 입술이 달싹였다. 거짓말을 하면 건호가 알아챌 것 같았다. 정말요? 되물으면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태원은 말을 고른다. 꿈을 꿨거든. 내가 너만할 때의 꿈…….

 

  그렇지만 그렇게 무시무시한 것들은 너는 모르는 게 좋겠다. 이번은 넘어가주렴.

 

  태원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더워서.”

 

  태원이 웃었다. 건호가 따라 웃었다.

  덥다는 그의 말 뒤에 어떤 사유들이 굽이굽이 또아리를 틀고 그를 물고 늘어졌을지, 이 새벽 건호는 언뜻 그 꼬리를 본 듯하였다. 그러나 태원이 오늘은 때가 아니라 덮어두었으므로, 건호 역시 그 꼬리를 밟지 않았다.

  또 언젠가 때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물러난 것은 아니었어도.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두 사람은 어쩌면 같은 생각을 했다.

 

  얼핏 스치는 무지개 같은 여름의 새벽이 끝나고 있었다. 태원은 생각 많은 건호의 까맣고 어린 뒤통수를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닌데, 한 손에 다 들어올 것만 같았다. 더 따듯할 것 같았다.

  이 열대야의 끝자락, 새벽의 장막 아래서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태원은 그 동그랗고 유순한 온기에 손을 뻗는다.

 

  “더 자라.”

 

  묵직한 태원의 손바닥이 건호의 머리를 누르자 정전기가 인 것처럼 건호의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덕분에 건호는 고개를 더 푹 숙였다. 태원의 손이 자연스레 뒷목으로 미끄러졌다 떨어졌다. 태원은 건호의 뒷머리가 생각보다도 무르다고 생각했다. 건호는 태원의 손이 타는 것처럼 뜨겁다고 생각했다.

 

  태원이 소파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선다. 아주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홀로 거실에 남아, 건호는 쥐고 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미지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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