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여름밤 - 캐스커
00:0000:00

넌 멀리 있구나

마주 앉은 거리보다

어디서든 닿을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 캐스커, 여름밤

 

 

  짧은 겨울해가 어둠을 끌고 온 지 오래였다. 한 조각도 남김없이 까맣게 칠해진 집안, 얕은 숨소리마저 묵살해버린 적막 아래 간간히 이불이 스치는 소리만이 났다. 너무 조용하다. 작은 식물이나 물고기 하나 키우지 않는 집 안에는 죽은 것들 뿐이었다.

  홀로인 침묵 속, 눈을 감을 때와 다름없는 새까만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언가 자근히 숨통을 짓밟는 것이 느껴졌다. 자비 없고 돌이킴 없는 비정하고 단단한 앞발. 제 숨통을 끊어놓는 데엔 발톱을 꺼낼 필요도 없을 만큼 강한.

  느릿하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더위에 짓눌리는 열대야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삑, 삑삑, 삐삑… 삑.

 

  문에서 예고 없던 소리가 들린다. 녀석일 것이다. 이 시간에, 이곳에 녀석이 오는 것은 오랜만이었지만, 저 소리가 녀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시간을 끌 것 없이, 기다렸던 손님을 맞듯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이사를 오며 바꾼 현관 비밀번호를 녀석은 외우지 못했다. 녀석의 머리보다는 손이 기억하고 있을, 이전에 살던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다 벨을 누르곤 했다. 취한 녀석의 걸음을 따라 비틀거릴 손가락이 눈에 선했다.

  거실의 공기는 찼다. 등줄기가 서늘해질 만큼. 녀석이 올 줄 알았다면 난방을 좀 더 세게 틀어둘 걸 그랬다. 몇 번을 실패하는 듯, 간간히 이어지는 기계음은 실패를 알렸다. 그래도 녀석은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벨을 누르지 않았다.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기다리듯 나는 현관 앞에 멈추어 서 있었다.

 

  형……. 혀어엉…. 이윽고, 초인종 소리 대신 복도에 가늘게 울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끊길 듯, 끊기지 않는 길잃은 새끼 고양이의 울음 같은. 나이를 먹어도 그 목소리는 언제나 어리다. 어리광이 한껏 묻어 애처롭기까지 하다. 문 앞에 다가서니 현관 등이 켜져 집안을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녀석의 무게가 더해져 무거워진 문고리를 잡고 문을 천천히 열었다. 형. 겨울바람과 알코올의 향이 현관의 주황 불빛과 뒤섞여 쏟아졌다. 열린 틈새로 잽싸게 들어선 녀석이 품에 파고들었다. 녀석의 뺨은 유독 붉었고, 머리는 젖어있었다. 하얗고 찬 것들이 녀석의 어깨 위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한 손에 완전히 감싸지지 않는 어깨를 감쌌다. 열기 어린 손바닥에 눈송이가 녹아 녀석의 어깨를 적셨다. 눈이 오는구나. 시리고 차가운 감각이 들지도 못한 잠을 깨웠다. 녀석이 허리에 팔을 둘러왔다. 현관등이 도로 꺼져 다시 집안에 어둠이 깔릴 때까지, 녀석과 함께 미동도 없이 멈추어있었다.

 

  “…추웠겠구나.”

  “응…. 밖에 대따 추워.”

 

  어둠 속에서 볼이 눌려 웅얼대는 소리로 녀석이 말했다. 들어가자. 걸음마를 하듯, 한 발씩 걸음을 옮겼다. 늘어진 녀석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운데에 두었던 베개를 살짝 옆으로 옮기고, 그 옆에 나란히 베개를 하나 더 놓았다. 침대의 왼편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곧 녀석이 이불 안으로 비집고 기어들어왔다. 체온으로 데워놓았던 이불 안이 충분히 따듯하지 못한 듯 품 안에 파고드는 녀석을 안으면 오른편이 한참 남았다. 그 사이에 더 큰 듯한 녀석의 등을 끌어당겼다. 여전히 동그란 녀석의 뒤통수를 감싸 아직도 찬 녀석의 뺨을 데웠다.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두 몸이 맞물렸다. 목 부근에서 서늘함과 온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빛 들어올 구석 없는 집안이었는데, 녀석의 감은 눈만은 볼 수 있었다. 그 긴 속눈썹 끝 아직 녹지 않은 얼음 결정이 빛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어쩐지 녀석이 얼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감은 눈이 다시 뜨이지 않을 것 같은, 얼어버린 눈꺼풀이 파리하게 부숴져 흩어질 것 같은.

  미적지근한 입술을 녀석의 눈 위에 맞추었다. 녀석이 작게 웃었다. 내가 무엇을 불안해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괜찮아, 형.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 하는 것처럼.

  녀석을 더 세게 안아도 녀석은 괜찮아, 괜찮아, 같은 말만 하듯 눈은 뜨지 않는다. 보살처럼 미미하게 웃는 입꼬리가 놓쳐버린 풍선 끈 같다. 힘껏 손을 뻗어보아도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날아간.

  품에 안은 것이 죄 바스라지는 새벽, 차라리 이대로 머물렀으면 좋을 겨울밤이 짧기만 하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