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각, 또각.
한겨울에 장대같이 내리는 빗소리 위로, 높고 날카로운 구둣소리가 또렷했다. 그러나 그 간격은 일정했고, 여유로이 느긋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사냥감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발자국 소리가 창고 안을 울리자 장내의 적막 위로 긴장이 깔렸다. 검은 양복들 사이로 난 길을 가로지르는 흰 정장이 흐린 창고의 불빛에도 유독 빛났다. 각을 세워 제게 머리를 숙이는 이들 쪽에 눈길 주지 않은 채, 수연은 박건호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꼭 누가 끌어다 앉혀놓은 것처럼 컨테이너에 기댄 채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는 살아있을 때도 죽어있는 사람 같았다. 피냄새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늙고 다친 짐승 같았다. 반쯤 뜨인 혼탁한 눈에는 늘 흐릿하게 죽음이 섞여있었다. 짙은 죽음의 냄새, 침전의 자취. 수연은 그런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 정작 죽어도 죽은 게 아닌 것 같잖아. 채수연은 몸을 낮추어 그의 앞에 무릎을 접어 앉았다.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이미 식어 굳어버린 피가 흐르던 그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찬 공기에 벌써 뻣뻣해진 피부가 싸늘했다. 푹 꺾인 그의 고개를 느리게 들어올렸다. 그가 저를 보도록.
눈을 깜, 박 하니 다시 한번 그의 침전하는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원망도, 비통함도, 애원도 없는 눈동자. 심해에 깔린. 마침내 그에게 어울리는 자리로 돌아간. 수연의 입꼬리가 가볍게 말려 올라갔다. 그에게 보여준 적 한번 없는 다감한 미소였다. 미안해요. 내가 상복을 챙겨입는 걸 깜박했네. 다시 눈을 감았다 뜨자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뺨으로부터 수연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의 고개 역시 도로 무겁게 떨구어졌다.
자연스레 그의 붉은 가슴팍으로 시선이 이끌렸다. 그의 피로 얼룩진 와이셔츠 위에 흰 담배 한 개비가 떨어져 있었다. 불이 붙지 않은, 아니 불이 붙지 못한 새것. 수연은 끝이 검고 붉게 물든 그 담배를 집어들어 제 정장 포켓에 꽂았다. 그를 두고 훌쩍 일어서는 수연보다 높은 것은 없었다.
수연이 뒤를 돌아 가벼이 고갯짓을 하자 여럿이 분주하게 구둣발소리를 내었다. 수연은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영원히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며, 수연은 꽂아두었던 그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의 피가 물든 담배 끝이 타들어갔다. 수연은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비릿하고 끈적한 것들이 수연의 폐 깊숙한 곳으로 흘러내렸다.
내쉬는 숨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