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 형 일어나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급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손이 열심히도 건호를 흔들었다. 끝물 늦더위에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뼈마디가 굵은 손이 가는 어깨를 짜증스레 뒤로 밀었다. 무슨 일이니, 묻기도 전에 선우가 역정을 냈다.
“선풍기 틀구 잘 땐, 문 닫구 자면 안 되는 거 몰라?”
선우가 선풍기를 등지고 서 있었다. 선우에게 막힌 바람이 건호까지 닿지 않았다. 건호가 선우를 밀었던 손으로 제 눈을 덮어 짚었다. 어쩐지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선우가 다시 소리쳤다.
“죽을라구 그래?”
자다 깨서는 웬 뚱딴지 같은 소린지. 꿈이라도 꿨나. 방에는 창문도, 시계도 없어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었다. 활짝 열린 방문으로도 빛이 그닥 들어오지 않는 걸로 보아 아침은 먼 듯 했다. 핸드폰을 찾으려 건호가 침대 옆 테이블을 더듬었다. 잠긴 목소리로 건호가 물었다.
“무슨 소리니.”
“형 그거 몰라? 선풍기 틀고 문 닫구 자면 죽어.”
죽어, 에 선우가 강세를 두었다. 그리곤 혼이라도 내려는 것처럼 불을 팍, 켰다. 건호가 도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흰 불빛이 폭력적으로 파고들었다.
“나두 그래서 죽을 뻔 했잖어.”
건호와 비슷한 모양새로 눈썹을 구기며, 선우가 다시 건호의 옆으로 돌아왔다. 건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선우를 바라봤다. 그렇게 말하는 선우의 이마엔 땀에 젖은 머리칼이 붙어있었다.
“안 죽어…….”
“죽는다니깐! 형 안 왔음 죽었어.”
꿈 얘기네. 선풍기가 연탄도 아니고. 건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선우는 도로 자기 방으로 갈 생각이 없는 듯, 아예 건호 옆에 누워버린다.
“이번엔 내가 형 살려준 거야.”
*
아이가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동네의 맨 아래서부터 이백아흔여섯 개나 되는 계단을 뛰어올라가면 아이가 사는 집이 있다. 등고선을 그대로 따라 만들어진 계단은 한 칸이 아이의 무릎까지 오는 것들도 있다. 그래도 아이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법이 없다. 힘에 부칠 때까지 뛰어올라간다. 집에 가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아이의 뜀박질이 느려지다 끝내 멈춘다.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는 아이가 계단에 털퍽 주저앉는다. 한바탕 비가 내리고 난 후에 축축해진 계단이 아이의 바지를 적신다. 아이는 아랑곳 않고 습한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후에야 일어나 바지를 턴다. 뛰어올라온 의미가 없게, 아이는 나머지 계단을 최대한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살면서도, 이렇게까지 사람 살지 않는 듯한 곳도 없다. 아이의 동네에선 사람 소리보다도 개 짖는 소리가 이곳이 사람이 사는 곳임을 증명해주었다. 하루가 멀다시피 들리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누군가의 고함,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비명소리에는 모두가 둔감해진지 오래였다. 적막 아닌 적막 사이로 타박, 타박, 이어지던 아이의 발소리가 끝내 멈추었다. 이따금씩 꺼질 듯이 깜박이는 가로등의 주황 불빛이 아이의 그림자를 콘크리트 바닥 위에 드리웠다. 지난 주 태풍이 슬레이트 지붕과 함께 날려버린 녹슨 파란 대문의 자리에는 판자가 있었다. 이마저도 비에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도둑질을 하러 들어가는 사람처럼 아이가 조심스레 판자문을 밀고 깨금발로 들어섰다.
방 안에 온통 진동하는 익숙한 술냄새에 섞여 취한 남자와 여자의 코고는 소리가 번갈아 났다. 아이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깨우지만 않는다면 오늘 밤은 그대로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술병과 재떨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팔다리를 피해 자리를 잡았다. 벽을 보고 누워 웅크렸다.
덥다. 열린 창문으로도 바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고작 다리만 오므렸다, 폈다 하며 자세를 고쳐보았지만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아이는 제 팔을 베고 누워 장판 끝자락을 뜯었다. 이미 죽 찢으면 찢길 듯이 벗겨지고 있는 벽지 뒤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아이는 검지손가락으로 가루를 눌러 모았다. 땀에 젖어 끈적한 손가락에 해로운 것들이 잘도 묻어났다. 기껏 모아놓고는 손가락을 비벼 다시 털어내었다. 아이는 검게, 그리고 희게 변한 손가락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혀로 핥아보았다. 짙은 회색 맛에 아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쳤던 비가 다시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붕을 톡, 톡 건드리더니 이젠 아예 부술 듯이 쏟아부었다. 열린 창문으로도 물이 튀기 시작했다. 아이의 뺨에도 시원한 빗줄기가 떨어졌다. 아이가 천장을 보고 돌아누웠다. 꼭 집 밖에 서 있는 것처럼 제 얼굴에 내리는 비를 맞던 아이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틀에 팔을 올리려면 까치발을 서야했다. 손으로 창틀을 잡은 채 아이는 서늘해진 바깥 공기를 다시 깊게 들이 쉬었다가 한숨처럼 탁, 내쉬었다. 땀과 비로 젖은 아이의 얼굴에 머리카락이 붙어있었다. 까치발을 디딘 발 앞축이 뻐근해질 즈음 빗소리를 세는 것을 포기한 아이는 무엇이 생각난 듯 뒤를 돌았다.
방 반대편에서, 선풍기가 탈탈 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거 알아? 밤에, 선풍기 틀고 문 전부 닫고 자면 죽는대. 아이는 오늘 낮에 들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그런 말을 테레비 뉴스에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남자와 여자는 아직도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아이의 심장이 서서히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이는 닫을 수 있는 문이라고는 전부 꼭꼭 걸어 잠궜다. 혹시 몰라 부엌의 미닫이 문까지 전부 잠그고서는 마지막으로 창문을 잡고 섰다. 들이쉴 수 있는 만큼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창문을 닫았다. 창문에 막힌 빗소리가 영원히 그치지 않을 듯 들렸다.
아이는 다시 술병과, 재떨이와, 남자와 여자의 팔다리를 지나쳐 옷장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에 아이는 숨을 멈추었다. 태평한 두 사람의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이는 다시 한 발씩 옷장에 자신을 구겨 넣었다.
가장 안락하게 웅크리고 누울 수 있는 자세를 찾아 아이는 몇 번을 다시 뒤척였다. 처음엔 서늘한가 했던 옷장 안이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땀이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침이 얼마나 먼지 알 수 없었다. 탈탈 거리는 선풍기 소리가 멈추지 않길 바라는 기도와 같은 기대 속에, 아이가 눈을 감았다.
착한아이였던 적은 없지만 울지 않을 자신만은 있는 아이는 여름 날에 성탄제의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