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첫사랑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상상했습니다. 단정하고, 조금은 헐렁한 감이 없지 않은 옷을 차려입은 당신을. 와이셔츠의 손목 단추를 공연히 끼웠다, 풀었다, 하는 당신을. 쑥쓰러움에 입술을 앙 다문, 멀끔한 입가를 지닌 당신을. 그 입술에 내게 저번 주에 건네주었던 것과 비슷한 꽃다발을 대고 서성이는 당신을. 스치는 모든 발걸음에서 익숙함을 좇으려 신경이 곤두섰을 당신을. 신발코를 바라보느라고 애타게 기다리던 그 사람을 한 박자 느리게 발견하였을 것 같은 당신을. 애먼 꽃다발에 얼굴을 묻으며 부끄러움과 환희에 찬 얼굴을 하였을 당신을. 준비했던 말을 속으로 어설프게 되읊었을 당신을. 너무도 멀고 눈부신 것을 눈에 가득 담는 당신을. 그리 낯선 당신을요.
그때 나는 당신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차마 사랑은 입에 담지 못하였을 것 같은 당신입니다. 진심을 건네는 자리에서조차 ‘좋아한다’는 얄팍한 언어로 마음을 숨기려 들었을 당신은 나의 상상에서도 말이 없습니다. 한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삐뚤빼뚤 사랑이라는 단어가 온 마음을 빽빽 채워도 당신은 냉가슴만 앓았을 것 같아요. 나는 이름도 모르는 당신의 첫사랑이 되어 건호야, 어린 당신을 불러봅니다. 할 말 있니. 물으면 어린 당신은 어쩔 줄 몰라 얼굴을 붉힙니다. 그런 당신을 더욱 골려주고 싶지만, 웃고 나서 다시 바라보는 당신의 입가엔 어느새 흉터가 져, 나는 온 시선을 그에 빼앗기고 맙니다.
그때 나는 새로 부임 온 선생을 골리는 학생처럼, 집요하게 당신의 첫사랑 타령을 하다 그만 당신에게 이름을 불리고 말았습니다. 내 이름 석 자를요. 당신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당신이 그럴 때가 특히나 불만스럽습니다. 애인의 이름을 멀리 밀어낼 때만 부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나는 서러워져 시위하듯 찬 소파에 나가 웅크렸습니다. 모질지도 못한 당신은 금세 따라나왔지요. 추우니 들어와서 자란 말에 당신보다 더더욱 무른 나는 속도 없이 도로 당신을 따라 들어가 당신의 옆에 누웠습니다. 토라짐의 증표로 등을 돌려 누우니 허리를 안아오는 팔이 단단했어요. 나는 또 그런 데에 한없이 마음이 풀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이니 뭐니, 그깟 단어가 중요한가. 당신의 팔 위에 나의 팔을 겹치며 나는 삐죽 나왔던 입술을 삐져나온 눈물 한 방울과 함께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밤 당신은 죽은 내 꿈속에 갇혀 울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봤어요. 당신의 기도로 겨우 살아난 나는 눈을 뜨자마자 정말로 우는 당신을 마주했습니다. 괜찮아요. 꿈이에요. 무서웠구나. 나 여기 있어요. 놀랄 새도 없이, 얕게 헐떡이는 당신의 머리를 껴안고 나는 멈추지 않고 속삭였습니다. 나의 죽음보다 당신의 눈물에 겁이 났어요. 당신의 눈물 몇 방울에 익사할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의 눈물이 그렇게까지 무거운 것인 줄은 처음 알았어요.
영문도 모른 채 차오른 당신의 눈물이 마악 목 부근에서 넘실댈 즈음 당신이 말했습니다. 아연아, 사랑한단다. 사랑해. 말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순식간에 나는 내가 잠기던 곳이 수조가 아니라 바다임을 깨달아요. 비바람이 불고 파도가 하늘을 가렸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렇게 듣고 싶던 말이었는데도요. 그렇게 하고 싶던 말이었는데도요. 휘몰아치는 당신의 폭풍 속에서 나는 붙들 것이 당신 뿐이었습니다. 땀에 젖은 당신 머리칼을 손에 넘치게 쓰다듬었어요. 무서워요, 왜, 갑자기…. 솔직하고 짧은 단어들만을 간신히 꺼내놓았습니다. 눈물이 다른 말은 모두 막아버렸거든요. 나도 무서워서 그래. 아직 부글거리는 당신의 음성에 나는 당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나도요, 사랑해요. 나는 당신이 쏘아올린 우리의 유일한 북극성을 좇았습니다. 구름을 걷어내고 눈물 아롱져 별빛이 된 당신 두 눈을 마주했습니다. 젖은 두 눈을, 축축한 두 입술을 맞대고 숨을 불어넣었습니다. 물 위에서 호흡하는 법을 처음 배우는 인어처럼 연약한 당신의 폐가 찢기기라도 할까, 나는, 우리는, 사랑해, 사랑해요, 지상의 공기를 여러 번 나누어 서로의 입술에서 입술로 옮겼습니다. 오래 눈을 감았다 떠도 아직 당신은 내 앞에 있었습니다. 그건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해가 뜨기 전에 당신 약속을 받아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라지지 말아요. 그럴게. 내일 아침에도 해주면 안 돼요? 그래, 아침마다 해줄게.
그제야 나는 다시 눈을 감아요. 당신이 눈을 감은 것을 보려 잠시 떴다, 다시 감아요. 당신의 사랑한다는 말이 기다리고 있는 아침을 위해 나는 당신을 안고 다시 꿈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시 잠들었을 때엔 당신의 마지막 사랑이 되는 꿈을 꾸었던 것 같아요. 새로 온 아침에 내가 가장 먼저 들은 말은 당신의 사랑해, 였어요.
지난 밤 당신은 죽은 내 꿈속에 갇혀 울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봤어요.
/ 송승언, 이장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