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닿을 수 있는 거리, 손만 뻗으면.
*
따듯한 물 속에 몸을 뉘였을 때처럼 노곤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적당히 즐길법한 무기력함. 녹진한 피로에 젖은 눈을 느릿하게 뜨면, 블라인드에 단정히 조각난 햇살이 벌써 천장에 선을 긋고 있었다. 눈을 무겁게 끔뻑이면, 오래 머물던 물속에서 빠져나왔을 때처럼 천천히 다른 감각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유독 깨어나기 싫은 날이었으므로,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 형 깼어? 그 움직임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뿅, 뿅, 거리는 녀석의 핸드폰 게임 소리가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챈 고개가 녀석 쪽으로 돌아갔다. 녀석의 시선은 여전히 요란한 작은 화면 속에 처박아둔 채였다. 목소리가 잠겨있는 것이 녀석 역시 깬 지 얼마 안 되었겠거니, 짐작하게끔 하였다. 햇살 조각이 녀석의 머리칼 위로도 비추어, 안 그래도 밝은 녀석의 머리칼이 거의 흰색으로 보였다. 흰 털을 가진 강아지처럼 푸석푸석하고, 제멋대로 마구 뻗쳐있는 머리칼. 그 위로는 작은 먼지들이 부유하는 것이 보였다. 민들레 홀씨보다도 여유롭고, 가볍게.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칼을, 그 야무진 정수리를 푹 눌렀다. 머리칼이라기보다는 털에 가까운 것들이 손바닥 아래에서 폭 눌리는 감각이 제법 좋았다. 아, 형, 잠깐만! 얄팍한 집중이 깨진 데에 녀석이 작게 항의 했지만, 아랑곳 않고 녀석의 동그랗고 작은 두상을 쓰다듬었다. 참 작다. 아이를 안아본 적은 없지만, 녀석의 머리는, 아주 갓난아기일적부터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법하게 작았다. 손의 무게에 녀석의 고개가 끄덕일 때마다 녀석이 아아, 하고 볼멘소리를 내었다.
아, 죽었잖아. 결국 녀석이 손의 무게를 이기고 고개를 홱 들었다. 얹혀있던 손이 떨어지며 녀석의 어깨를 스쳤다. 그제야 마주하는 녀석의 시선. 그 눈동자에 햇살이 깃들어 밝고 투명한 갈색의 홍채가 훤히 보였다. 이내 녀석이 눈이 부신 듯 눈을 한껏 찡그리며 도로 머리를 떨구어 베개에 뺨을 푹 파묻었다. 불만이 섞인 듯한, 그러나 또 그렇게 미련이 남지는 않은 듯한 녀석의 눈에 또 금세 졸음이 섞여들었다.
무슨 고집이 솟은 건지, 아까처럼, 녀석의 머리에 다시금 손을 대고 싶어져 손을 뻗었다. 도로 손바닥 가득 잡혀오는 녀석의 머리칼을 마음대로 쓰다듬었다. 왜애. 녀석이 어느새 눈을 감은 채 물었다. 그 말이 그닥 물음의 성격을 띄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녀석의 두상을 도로 빚듯이, 한참을 만지던 손을 천천히 녀석의 뒷목으로 끌어내렸다. 목이 너무 얇아 한 손에 다 잡힐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길고 유연한,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더 아래로 내려온 손이 녀석의 날갯죽지 위를 훑을 때에는 약간은 울퉁불퉁하니 솟은 잔근육들이 느껴졌다. 덥다고 걷었을지, 이불 하나 덮고 있지 않았음에도 녀석의 몸에선 뜨끈한 열기가 어른거렸다. 간지러. 녀석이 키득대며 어깨를 움츠려도 손을 멈출 생각은 없어,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은 이제 녀석의 허리께를 쓰다듬었다. 무얼 하는 것인지 딱히 궁금하지 않은 듯이 녀석은 더이상 말이 없다. 어쩌면 도로 잠들었을지도 모르는 녀석의 감은 눈이 평온해보였다. 사락. 살과 살이 스치는 소리만이 났다.
녀석의 허리께에 머무르던 손을 도로 천천히 거두었다. 팔을 베고 잠든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 쪽을 보고 눈을 감은 녀석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렁거렸다. 제 의사와는 관계 없이 시도때도 없이 얼굴을 디미는 녀석은, 이런 타이밍을 맞추는 재주는 그닥 없었다. 그러나 제 쪽에서 먼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거리이기에. 손만 뻗으면.
일어날 시간이다. 몸을 일으키려니 제쪽의 매트리스가 크게 흔들렸다. 그때에 녀석의 눈이 잠시 뜨이는가 하더니 다시 감겼다. 그런 녀석의 눈 위로 손을 덮었다가 비로소 상체를 일으키는데, 녀석이 손목을 붙잡았다.
형. 나 뽀뽀.
쓸데없이 단호한 투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로 녀석이 입술을 쪽 빼었다. 닿을 수 있는 거리 보다도 가까운, 닿아있는 거리.
매트리스가 느릿하게 한 번 더, 더 깊숙이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