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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고 지듯이 (inst.) - 사도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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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겨울 이후로는 현관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이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어딘가 얼었다 깨지기라도 했는지, 끼익, 끽, 소리가 유난스러웠다. 인사 없이 들어서는 집안, 말소리를 대신 하려는 듯이. 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나면 비로소 다시 찾아드는 적막 속 건호는 조용히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인사를 받을 이도, 인사를 해줄 이도 없다는 게 서운하다 느껴진 적은 딱히 없었다. 익숙한 고요였다. 보일러가 틀어지지 않은 약간의 서늘한 공기 역시 익숙했다. 탁, 탁. 두 짝의 운동화가 떨어지면 훌쩍 큰 키를 숙여 가지런히 신발을 정리해두었다. 그 옆, 익숙하고 낡은 구두 한 켤레가 흐트러진 채 놓여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때서야였다.

 

  “다녀왔…….”

 

  반사적으로, 잘못이라도 한 듯이 화들짝 놀라서는, 숙였던 허릴 펴 뒤를 돌고, 적막이 여전한 허공에 대고 인사를 하려던 건호의 입술이 느려지다 이내 소리를 먹었다. 소파 팔걸이에 뉘여있는 태원의 까만 정수리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인사 때를 놓쳤다는 생각에 따끔한 공기 속 제 것이 아닌 숨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느리고, 규칙적이고, 낮은 숨소리. 바닥에 흐르는 공기 같은. 끝마치지 못한 제 인사말에도 돌아보지 않은 그의 숨소리.

  건호는 저도 모르게 제 가방끈을 잡았다. 잠시 굳은 채 서 있다가, 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로, 잠든 사자를 깨우지 않으려는 생쥐처럼, 발소리를 죽여 제 방을 향했다. 양말이 마루에 스치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금방이라도 그가 깨어, ‘왔니.’, 피곤 묻은 소리로 물을 것 같았다. 제 방을 향하며 슬쩍 건너다본 소파의 그는 여전히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건호는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살짝 닫고, 천천히 가방을 내려놓았다. 천과 천이 스치는 소리에 문밖의 그가 깰까 행동이 느렸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도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별안간 건호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 혹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소파의 팔걸이, 그의 머리맡으로 걸어갔다. 꼭, 부엌으로 향하려던 척을 하는 것마냥 어정쩡한 모양새로.

잠든 태원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종종 뉴스를 보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보았어도, 이리도 규칙적이고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는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직 날은 추운데, 그는 입은 옷 외엔 덮은 것 하나 없이 잠들어있었다. 자신의 팔을 베고 모로 누워 잠든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제가 낸 소리에 잠이 얕게 깨기라도 한 것인지, 원래부터 그랬을지 건호는 알 길이 없었다. 제 시선을 그가 눈치챌까, 훔쳐본 그의 얼굴로부터 황급히 시선을 떼며 건호는 보일러를 틀었다. 틀 일이 많지 않은 보일러다. 그는 추위를 타는 사람이 아니었고, 저 역시도 그랬으므로.

 

  그래도 춥지 않을까. 3월의 공기는 아직 겨울이라 해도 믿을 법하게 쌀쌀 맞았다. 말소리 없는 집안에는 유독 추운 공기가 흘렀다. 건호는 그가 누워있는 소파 등받이를 바라보았다가, 그의 방을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마음이 영 편치 못 했다. 누구한테서일지 모르지만, 타박이라도 받는 기분도 드는 듯 했다. 이불을…. 이불을 가져다주어야…….

태원의 방에는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출입금지 팻말이라도 세워진 것처럼. 그의 방은 함부로 침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불을. 건호는 그의 방 앞까지 가 겨우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다시 한 번 소파를 돌아보았다. 꼭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 같아. 그의 방 문턱에 발끝만을 대었다가, 도로 손잡이를 놓았다. 더 고민 않은 채 제 방을 향했다.

 

  품에 제 이불을 안고 나왔다. 괜히 냄새를 한 번 맡아보게 되었다. 이상하리만치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베개까지 가져다주면 태원이 깰 것 같아, 이불만을, 조심스레 그의 옆에서 펼쳐 덮어주었다. 이불 끝자락을 잡은 손가락이 꾸욱, 눌리는 만큼 건호는 입술을 꾸욱 물었다. 이불을 덮어주는 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러던 차에 그가 작게 뒤척여, 건호는 숨과 함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고나니 외려 아주 약간 펴진 것 같기도 한 그의 인상에 건호는 제멋대로 안심하며 마저 그의 위로 이불을 펼쳐 덮었다. 등까지 제대로 덮어주지 못 한 것이 신경 쓰였으나, 그를 깨워서는 안 될 것이므로, 건호는 도망치듯 제 방으로 돌아왔다. 이불이 없어 훵한 제 침대를 보며 드는 묘한 기분을 건호는 무어라 정의하지 못 하였다.

 

 

  그는 오래 잠들어있었다. 아주 긴 여정을 다녀와 지친 여행자처럼. 그리하여 그날 밤, 건호는 이불 없이 베개에만 머리를 뉘이고 잠에 들어야했다. 추위가 발끝을 스치는 기분이 들었을 때에, 건호는 그 기분이 뿌듯함에 가깝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몸을 조금 더 웅크리며,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건호는 눈을 감았다. 감기에 걸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난 새벽, 건호는 제 위에 얹히는 포근한 무게를 느꼈다. 찬 발끝이 덮이는 감각을 느꼈다. 몽롱한 정신 속, 제 옆에 누군가의 존재를 느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도 확실하게, 선명하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두텁고, 무거운, 투박하고, 거친, 그리고 뜨거운 손바닥이 짧지 않게, 그러나 조금 아쉽게 머물다 떠나갔다. 두어 번 제 어깨 위 덮인 이불을 누르고 그가 방을 나갔다.

  조금 더 빠르게 뛴 심장의 박동을, 긴장해 삼킨 침이 넘어가는 소리를, 몸을 조금 더 웅크려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던 것을, 그의 손바닥 온기 아래 조금 더 오래 머무르려 저도 모르게 얼굴을 묻었던 것을, 어둠이 숨겨주었다. 춥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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